윌리암 틴데일(1490~1536)

<목차>
최초의 영역 성경 출간자
성직자들의 오류를 지적
평신도들에게 성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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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외의 다른 인물들
- 윌리암 틴데일 (1490 ~ 1536)
- 존 칼빈 (1509 ~ 1564)
- 존 녹스 (1514 ~ 1572)
- 블레즈 파스칼 (1623 ~ 1662)
- 존 번연 (1628 ~ 1688)
국내의 다른 인물들
- 문명래
- 박충서
- 연광숙
 

성직자들의 오류를 지적


1490년 윌리암 틴데일은 영국의 웨일즈 지방 변두리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가 7개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아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고전어를 비롯한 언어 학습에 몰두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이 틴데일이 어린 시절에 대해서 알려진 전부이다. 그러므로 그가 어떤 계기로 언제부터 진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어느 때 어떠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청년기의 행실로 보아 주님의 소명에 합당한 인물이었음은 분명한 것 같다.

틴데일은 1512년 옥스퍼드의 막달렌 대학에 입학하여 언어와 문학에 대한 지식을 쌓았고 특히 성경 연구에 몰두했다. 1515년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당시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던 캠브리지 대학으로 옮긴다. 그곳에 다니면서 글로스터에 사는 웰치라는 사람의 아이들 가정교사로 일하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당시 성직자들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웰치 부부는 종종 훌륭한 만찬을 준비하여 수도원장, 학장, 박사 및 고위 성직자들을 초대했고 자연스럽게 틴데일도 그들 속에 끼게 되었다. 그들은 식사를 마치면 루터, 에라스무스 등에 대해 또는 하나님에 대해 논쟁을 하였다. 틴데일은 다른 이들이 잘못된 주장을 할 때마다 주저하지 않고 그들을 반박했다. 그의 반박은 적절한 성경구절을 찾아 제시하면서 그것을 근거로 하는 논리정연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논쟁 때마다 성직자들의 무지와 신앙에의 맹목성의 여지없이 드러나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양들의 영혼을 맡은 자들로서 하나님 앞에 자책하지 않았다. 오히려 틴데일에게 앙심을 품기 시작했다. 더구나 틴데일이 나타난 이후로 웰치 부부가 성직자들을 자주 초청하지도 않고 혹시 그들이 방문을 해도 전처럼 쾌활하게 대하지도 않자 그에 대한 화살이 모두 틴데일에게 쏟아졌다. 그들은 틴데일의 말이 이단이라고 단언했으며 수많은 죄목을 덮어씌워 그를 주교의 종교법 고문관에게 고발했다.

틴데일은 어떤 신학자와 사귀게 되었는데 어느날 그 신학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내뱉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 없이는 지낼 수 있어도 교황의 법 없이는 지낼 수 없다.” 틴데일은 이처럼 불경한 말을 듣고 참을 수 없어, 교황이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던 그 당시 생명이 위태로울지도 모르는 말로 응수했다. “나는 교황과 그의 모든 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자기를 살려두신다면 몇년 안에 쟁기를 가는 소년이 자기보다 더 성경을 잘 알게 만들겠다고 덧붙였다. 더 이상 글로스터에 머물 수 없게 된 틴데일은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런던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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