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칼빈 (1509 ~ 1564)

<목차>
그의 피, 나의 허물을 씻어버리고
열두 살짜리 소년 성직자
문학, 법률, 신학의 권위자 되다
갑작스런 회심, 삶 방향이 바뀌다
최초의 신앙고백
「기독교 강요」와 칼빈
개혁자로서의 운명이 결정되고
개혁자로서의 삶을 열다
내적 성장을 통해 다져진 개혁자
충실한 조력자 이델리트
실천과 고투의 장
그리스도는 내게 유익이라
 
 
국외의 다른 인물들
- 윌리암 틴데일 (1490 ~ 1536)
- 존 칼빈 (1509 ~ 1564)
- 존 녹스 (1514 ~ 1572)
- 블레즈 파스칼 (1623 ~ 1662)
- 존 번연 (1628 ~ 1688)
국내의 다른 인물들
- 문명래
- 박충서
- 연광숙
 

실천과 고투의 장


칼빈을 추방하고 뒤를 이은 제네바 교회의 후임자들은 역량면에 있어서 그에 미치지 못했다. 제네바 교회는 칼빈을 모셔와야 한다는 찬반의견대립으로 파당까지 몰고 갔다. 이 틈을 이용해 로마 교회는 추기경 사돌렛을 동원, 공개장을 만들어 제네바 시민을 포섭하기 시작하였다. 칼빈은 비록 자기를 배신한 제네바 시민이지만 자기가 없다고 해서 교회 발전이 방해받는 일은 원하지 않았다. 그는 서신을 통해 현목사들에게 하나님의 종으로서 순종하기를 권면하였다. 그러나 거리에 약탈과 소란이 여전히 횡행하고 죄악과 부도덕이 판을 쳤다. 누가 보아도 이대로 내버려둘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 제네바 시민들은 칼빈을 추방한 것을 후회했다.

칼빈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1540년 9월 21일, 제네바 의회는 마침내 칼빈을 다시 초청할 것을 결의했다. 극구 초청에 응하지 않으려는 그를 친지들을 통해 적극 권유토록 하였다. 그는 비레에게 보낸 서신에 “나에게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신다면 결코 이 길을 취하지 않을 것이지만 지금 이 길을 택한 것은 온전히 나 자신을 하나님께 맡긴 결과입니다.”라고 결정된 그의 마음을 밝혔다.

1541년 9월, 칼빈은 개선장군처럼 제네바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죽기까지 23년간 그가 한 일은 에베소서 4장 11절부터 16절에 표현된 교회를 정부와 힘을 합해 제네바에 실현해 보려는 노력이었다. 그는 우선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관한 규정을 포함하는 교회법규를 만들었다. 그의 생각은 시민의 안정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도 법률에 의해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제네바의 법률기초 위원이었던 칼빈은 형법 부문에 이러한 생각이 반영된 처벌규정을 포함시켰다.

교회 법규와 형법이 병행되어 시행되면서 제네바 시민들의 자유는 심하게 제한받게 되었다. 신을 모독하면 사형에 처한다거나 심지어 설교중 아이들이 과자를 먹으려고 교회 밖에 있다가 처벌을 받는 일까지도 있었다. 그가 초반 10년 동안 직면했던 어려움은 엄격한 금욕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반발, 교회를 움직이려는 정치권력의 끊임없는 도전, 프랑스인으로서 제네바 시민들을 지도해야 하는 말못할 고초 등이었다. 칼빈은 생명을 내걸어야 폭동이 진압되는 경우를 여러번 경험해야 했다. 그러나 반대하는 무리들은 영의 자유가 아닌 육의 자유를 구하거나 자신들의 이권을 추구한 경우가 많았다. 참으로 하나님의 부름받은 일꾼으로 목숨바쳐 책무를 다하는 칼빈 앞에서 그들은 싸움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점점 세력을 잃고 정치는 칼빈의 손 안에 들어왔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데 어려움을 극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톨릭이 정치권력 위에 군림하여 개인의 신앙생활을 억압했듯이 개혁의 중추인물인 칼빈은 또다시 정치의 힘, 법률의 힘으로 신앙을 강요하는 우(愚)를 범했다. 이 일이 그 당시에 시대 상황에서는 받아들여 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앙의 근본원리가 하나님과 개개인의 자유의지에 대한 양심문제라고 볼 때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오류는 마침내 주된 죄목이 삼위일체론을 믿지 않는다는 것으로 세루베투스를 화형에 처하는 사건으로 번져 훗날 칼빈의 위대한 업적에 오점을 찍게 되었다.

이는 칼빈의 외골수적인 열심 때문이었다. 충직한 종으로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간 칼빈으로서는 그 분을 모독하는 사람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감히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것은 그가 영원 전부터 멸망의 그릇으로 예정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예정론을 주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같이 수많은 종파가 분열되어 있는 상태에서 만약 자신이 믿는 종교만이 옳다고 주장하여 힘을 통해 그 주장을 관철하려 할 경우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칼빈의 실수를 통해 깨달아야 하리라 본다.

10년간 피나는 노력의 결과로 제네바는 정결한 신교 도시로 면모를 일신하였다. 칼빈은 반대세력을 제악하고 평온한 가운데 복음전파에 전력할 수가 있었다. 신학교를 세워 직접 강의를 하면서 구주(歐洲) 각처로 경건한 복음주의 목사들을 배출하였다. 한편 마태복음 25장 14절부터 30절 말씀에 근거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칼빈은 이자가 허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윤은 신이 내리시는 은총의 표시이자 직업에 있어서는 성공에 징표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 주장은 획기적인 것으로 근대 자본축적의 계기를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제네바 시민에게도 직업에 충실하여 계속적인 성공을 거두는 것이 주님께 영광 돌리는 길임을 인식시켜 제네바 시의 부를 증가시켰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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