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녹스 (1514 ~ 1572)

<목차>
주님의 신실한 나팔수
먹장구름이 낀 암울한 시기에
마음의 닷 - 요한복음 17장
갤리선의 노예로
영국에서 목회자가 되어
전국을 순회하며 설교를
두려움 없는 녹스, 공격하는 사탄
 
 
국외의 다른 인물들
- 윌리암 틴데일 (1490 ~ 1536)
- 존 칼빈 (1509 ~ 1564)
- 존 녹스 (1514 ~ 1572)
- 블레즈 파스칼 (1623 ~ 1662)
- 존 번연 (1628 ~ 1688)
국내의 다른 인물들
- 문명래
- 박충서
- 연광숙
 

영국에서 목회자가 되어


녹스는 갤리선의 노예라는 신분에서는 해방되었으나 프랑스 세력을 등에 업고 있는 왕실이 가톨릭 정책을 펴고 있는 스코틀랜드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그는 자기의 석방을 주선했으며, 신교를 지원하는 에드워드 6세가 있는 영국으로 갔다. 그의 재능을 익히 알고 있는 영국의회는 그를 버윅에서 설교하도록 해주었다. 그곳은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국경지대로 스코틀랜드의 난민도 있지만 대부분은 스코틀랜드인을 증오하는 영국인들이 살고 있었다. 이 지역은 남부와는 달라서 가톨릭 세력이 완강히 버티고 있는 곳이었다. 따라서 스코틀랜드의 강한 억양을 가지고 있는 존 녹스가 신교를 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갤리선의 고된 생활을 견디어낸 그로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섬길 때에는 오직 그가 정하신 대로만 섬겨야 함을 성경으로 증명하면서 가톨릭의 제도적인 형식들 중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거하지 않은 인간의 생각에 기초해서 만든 반성경적인 것이 많다고 대담하게 설교하였다.

존 녹스의 이러한 설교는 많은 사람을 가톨릭에서 신교로 개종케 하였다. 그의 명성은 넓게 퍼져 1551년에는 에드워드 6세의 궁정 목사중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활동영영은 점점 넓어졌고 급료까지 받게 되어, 약혼하고 7년 동안 미루어온 결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6세가 죽고 가톨릭 신자인 메리 튜너 여왕이 정권을 잡자 그는 많은 개신교도들과 함께 제네바로 피신해야 했다.

제네바에서 지내는 동안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안락한 기간이었다. 두 아들도 낳으며 학문에 전념할 수도 있었다. 더욱 유익했던 것은 칼빈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그를 방문한 수많은 개혁 지도자들을 만나게 되어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지도자로서 지녀야 할 자격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훗날 스코틀랜드의 교회 제도의 기반이 장로교의 것으로 잡혀지게 된 원인은 여기에 있었다.

Copyright (c) THE EVANGELICAL BAPTIST CHURCH. All Right Reserved.
주소 : 140-011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1가 231-23 기독교복음침례회 / 대표전화 : (02)796-0092 / 팩스 : (02)796-8770